
40대, 다시 만년필을 들다
사회 초년생 때 선물로 받은 만년필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라미 사파리. 입문용으로는 거의 국민 만년필이라 불릴 만큼 유명한 모델이죠.
그런데 어느덧 저도 중년이 되었고, 이왕이면 조금 더 중후한(?), 아주 약간의 고급스러운 만년필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온라인으로 무작정 사기보다는 직접 써보고 싶어 찾아간 곳, 베스트펜 시필 후기를 공유합니다.
만년필, 왜 귀찮은데도 쓰는 걸까?
만년필은 솔직히 귀찮은 도구입니다.
- 잉크를 사서 갈아줘야 하고
- 자주 안 쓰면 마르고
- 가끔은 펜촉도 씻어줘야 하고
- 카트리지는 또 은근히 비싸고
그럼에도 만년필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볼펜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필감'
라미 사파리 특유의 서걱서걱한 느낌. 종이에 닿는 그 촉감. 잉크가 스며드는 속도까지.
악필인 저에게는 오히려 너무 미끄러운 볼펜보다 만년필이 글씨를 더 단정하게 만들어주는 착각을 줍니다.
지렁이 글씨를 어느 정도 잡아준다고 해야 할까요?
베스트펜, 국내 최대 만년필 매장
만년필은 개인 취향을 극도로 타는 제품입니다. 그래서 직접 시필(試筆, 써보기)이 가능한 매장을 찾았고,
그렇게 알게 된 곳이 베스트펜입니다.
베스트펜 시필 시스템 (2025년 기준)
시필비: 5,000원
시필비를 지불하면 다음을 제공합니다:
- 시필용 종이 여러 장
- 잉크 블로터 (잉크 찍어 쓸 수 있는 종이)
- 비교 시트 (펜명/촉 사이즈/한줄평/랭킹 기록용)
시필 가능 브랜드 (일부)
- 라미 (LAMY)
- 파일롯트 (PILOT)
- 펠리칸 (Pelikan)
- 몽블랑 (Montblanc)
- 워터맨 (Waterman)
- 파커 (Parker)
- 세일러 (Sailor)
- 플래티넘 (Platinum)
- 까렌다쉬 (Caran d'Ache)
- 기타 등등
시필 전 필수 준비: 기준 정하기
막상 가보니 브랜드도 많고 제품도 너무 다양해서 전부 써보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 "미리 사전 지식을 쌓아 두고 가야 한다"
사전에 정리할 것
- 내가 원하는 것
- 내가 원하지 않는 것
- 대략적인 후보군
- 예산 상한선
저의 소거 기준 5가지 (참고)
1️⃣ 외관·디자인 (가장 중요!)
아무리 필감이 좋아도 디자인이 취향 아니면 결국 손이 안 갑니다.
제 기준:
- ✅ 심플하고 모던한 디자인
- ❌ 너무 화려한 디자인
- ❌ 너무 올드한 클래식 디자인
- ❌ 너무 무거운 펜
- ❌ 너무 큰 펜 (필자 손이 작아서..)
2️⃣ 가격 상한: 약 30만원 내외
실질적인 첫 입문이기에 현실적인 선을 그었습니다.
디자인 너무 좋아서 시필했다가 가격 보고 조용히 내려놓은 제품도 있었습니다. (까렌다쉬가 대표적입니다 ㅎ)
3️⃣ 촉의 굵기
만년필 촉 굵기 종류:
| EF | Extra Fine | 극세. |
| F | Fine | 가는 촉, 일상 필기 적합 |
| M | Medium | 중간 굵기, 서명·노트 |
| B | Broad | 두꺼운 촉, 서명·강조용 |
저는 볼펜도 얇은 걸 안 쓰고 글씨도 큼직하게 써서 최소 F 이상으로 정했습니다.
다만, 유럽산 만년필(워터맨, 파커, 라미 등)은 일본산(파일롯트, 세일러 등) 보다 굵게 적힙니다.
예를 들어, 라미의 경우 EF촉이 파일롯트사 제품의 M과 거의 맞먹는 느낌이었습니다.
4️⃣ 필감 (개인 취향)
이번 시필을 통해 발견한 제 취향:
"부드럽지만, 약간의 서걱임으로 잡아주는 필감"
- 너무 미끄러운 것 ❌
- 너무 까슬한 것 ❌
- 적당한 피드백 ⭕
5️⃣ 캡 방식
대부분은 스크류 캡(돌려 여는 방식)이지만, 가능하면:
- ✅ 캡리스 (캡 없음)
- ✅ 푸쉬온 (끼워 여는 방식)
매번 돌려 여는 게 은근히 번거롭거든요.
시필 후 제외된 후보들
❌ 라미 다이얼로그 CC
장점:
- 캡리스인데, 독특한 회전식 펜촉 방식
- 모던하고 심플한 디자인이 매력적
제외 이유:
- 50만원대의 사악한 가격 ㅎㄷㄷ
- 상당한 무게감 (장시간 사용 부담)
https://youtube.com/shorts/QBhngNXpryE?si=hh2TB7KacFyeBGSA
❌ 파일롯트 커스텀 74
장점:
- 14K 금촉
- FM 이상부터 확실히 부드러운 느낌이었음
- 가성비 좋음 (10만원 중반대)
제외 이유:
- 디자인이 제 기준에서는 너무 클래식 > 외관에서 끌림이 부족함...
- 스크류 캡
❌ 펠리칸 M200
장점:
- 스틸촉인데도 굉장히 부드러움
- 잉크 풍부하게 나오는 느낌
제외 이유:
- 스크류 캡 & 디자인 취향 불일치
- 잉크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는 느낌(굉장히 주관적 의견)
❌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5
특징:
- 굉장히 부드러운 필감!
- 그리고 나 몽블랑이야!
제외 이유:
- 일상 필기에는 너무 과한 가격대(100만원 이상)
- F촉인데 거의 일본제 B급의 굵게 나옴...서명용으로는 괜찮을 듯
❌ 세일러 (Sailor)
특징:
- 브랜드 특유의 서걱임
- 일본 3대 브랜드 중 하나
제외 이유:
- 서걱임이 제 취향보다 강한 듯
❌ 플래티넘 센츄리 (Platinum Century)
장점:
- 가성비 좋음 (10만원대 초중반)
- 무난한 필기감
제외 이유:
- 디자인에서 끌림 부족. 무난한데 뭔가 특별함이 없는 느낌적인 느낌
❌ 파커(Parker) 아이엠 라이팅 리투얼
장점:
- 완전 내스타일의 외관 & 은근히 필감 부드럽고 좋음 (계속 어? 역시 파커! 이러면서 쓰게됨)
- 가격 착함 (5~7만원) 푸쉬온 캡.
제외 이유:
- 잉크 마름 관련 후기 존재 (푸쉬온 캡의 한계인가?)
최종 후보 3개
🥇 1순위: 파일럿 캡리스 데시모 (Pilot Capless Decimo)

가격: 약 18만원
촉: F, M 선택 가능
무게: 약 20g (경량)
무려 18K 금닙
장점:
- ✅ 캡리스 (노크식 버튼으로 펜촉 나옴)
- ✅ 가벼움 (장시간 필기 편함)
- ✅ 안정적인 필감
- ✅ 심플하고 모던한 디자인
- ✅ 휴대성 좋음
단점:
- 클립 위치가 특이해서 호불호 갈릴 수 있음
- 리필 시 메커니즘이 다소 복잡?
이런 분께 추천:
- 빠른 메모가 잦은 분
- 휴대용 만년필을 찾는 분
- 현대적 디자인 선호
🥈 2순위: 라미 2000 (LAMY 2000)

가격: 약 18~22만원
촉: EF, F, M, B
무게: 약 20g
장점:
- ✅ 심플하고 모던한 디자인
- ✅ 1966년 출시된 클래식 명품
- ✅ 부드러운 필감
- ✅ 견고한 바디 (섬유강화 수지)
- ✅ 푸쉬온 캡
단점:
- 스위트 스팟 존재 (각도 민감)
- 매트한 마감이 지문 묻음
이런 분께 추천:
- 심플 디자인 선호
- 클래식한 명성 중시
- 장기 사용 계획
🥉 3순위: 워터맨 헤미스피어 (Waterman Hemisphere)

가격: 약 16~20만원
촉: F, M
무게: 약 23g
장점:
- ✅ 균형 잡힌 디자인, 부담 없는 크기
- ✅ 푸시온 캡
- ✅ 부드러운 필감
- ✅ 합리적인 가격
단점:
- 특별한 개성 부족
이런 분께 추천:
- 입문용 고급 만년필
- 무난한 선택 원하는 분
- 선물용
만년필 구매 전 체크리스트
✅ 사전 준비
- 예산 설정
- 선호 디자인과 스타일 파악
- 촉 굵기 결정 (F/M 권장)
- 사용 목적 정리 (일상/서명/취미)
- 후보군 3~5개 사전 선정
✅ 시필 시 확인사항
- 손에 쥐었을 때 그립감과 무게감
- 필기 각도별 필감
- 잉크 흐름 (너무 많거나 적지 않은지)
- 캡 여닫기 편의성
- 장시간 쥐었을 때 피로도 고려
✅ 구매 후 관리
- 일주일에 1회 이상 사용 (마름 방지)
- 한 달 이상 안 쓸 경우 세척 후 보관
- 잉크 변경 시 펜촉 헹굼
- 직사광선 피해 보관
추가 팁: 만년필 입문자를 위한 조언
💰 예산별 추천
10만원 이하:
- 라미 사파리/알스타
- 트위스비 에코
- 플래티넘 프레피
10~20만원:
- 파일롯트 커스텀74
- 파일롯트 캡리스 데시모
- 워터맨 헤미스피어
20~30만원대:
- 라미 2000
🖋️ 잉크 추천
- 파일롯트 이로시즈쿠 시리즈
- 저는 나팔꽃(아사가오) 구매했습니다(약 1만8천원).

마무리: 취향의 시간
만년필은 효율의 도구라기보다 취향과 만족의 도구입니다.
직접 써보고, 고민하고, 천천히 고르는 과정 자체가 어른의 취미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최종 선택한 만년필 사용기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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