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속도(=광속)는 약 30만km/s이다.
빛이 초당 약 30만km를 이동한다는 건,
1초에 지구를 약 7.5 바퀴 돌 수 있는 속도이며,
약 1억 5천만 km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태양에서 지구까지는 약 8분 20초 만에 이동하는 속도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론 이 속도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측정 대상에 따라 속도가 달리 측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속 300km로 달리는 스포츠카의 속도를,
1) 정지해 있는 내가 측정하면 300km/h가 되겠지만,
2) 그 스포츠카와 같은 방향으로,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량에서 측정하면, 200km/h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속도는 어느 기준으로 측정하느냐에 따라 "상대적"인 값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에 따르면,
"빛의 속도(광속)"는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고 밝혀졌다.
이는 광속을 어디에서 측정하든,
동일한 속도(약 30만km/s)로 측정된다는 의미다.
(이것을 입증한 대표적인 실험으로는, 알버트 마이컬슨, 에드워드 몰리의 실험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상식,
즉, 속도는 "상대적"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광속은 불변한다"라는 건 모순적이며,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앞선 예시에서 스포츠카의 속도가 관측자에 따라서 달리 측정됐듯이,
마찬가지로 빛의 속도 또한 '관측자에 따라 달리 측정'되어야 할 것 같거든.
그런데 광속이 불변한다는 건,
1) 우리가 '정지'해 있든,
2) 빛과 '동일한 방향'으로 날아가더라도
(심지어 그 속도가 빛의 속도와 비슷한 29만km/s라도!)
그 어느 곳에서 빛의 속도를 측정하더라도,
동일한 속력(30만km/s)으로 측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순적으로 보인 문제를 풀어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특수 상대성이론"에서 이 문제를 풀어냈다.
이 이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게 무슨말이냐고?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속력을 구하는 공식을 떠올려보자.
속력 = 거리 / 시간
우리는 위 공식에서 나오는 "시간"이라는 factor가,
어떤 "공간"에서든,
"동일"하게 흐르는,
"절대적"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빛이 "어디서든" "동일한" 속도(30만km/s)로 움직이고 있다!
...는 명제가 "참(TRUE)"이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고정된 값"이 "아니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속력 = 거리 / 시간
위 공식을 놓고 봤을 때,
"거리"가 다른 두 관찰자에게 적용되는 "시간"이 같다면,
빛의 속력은 관찰자에 따라서 "다른 값"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거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속력"이 "같은 값(30만km/s)"이 도출되려면,
아래의 예시와 같이 "시간"이라는 값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천재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현상,
즉 (절대적이라고 알려진) "시간"과 "공간"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오히려 "물리법칙"과 "광속"이라는,
"상수(변하지 않는 값)"가 더 중요했다.
그는 시간과 공간으로 광속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거꾸로 광속을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만이 "절대적"이고,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 주장하고 밝혀냈다.
그에 따르면,
"운동하는 물체의 시간의 진행은 느려진다.
그리고 운동의 속도가 빛의 빠르기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지연은 더욱 강해져서,
결국 빛의 빠르기에 도달하면 시간은 멈추게 된다."고 하였다.
바꿔말하면 운동상태,
즉 물체의 속도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변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속도에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 변한다는 걸까?
고전역학에서 "시간"은 시간이고, "공간"은 공간일 뿐 각각은 서로 독립적으로 봤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의 상식과도 일치한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3차원의 공간"에 살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은 시간대로 흐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을 "4차원"의 "시공간"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니 잠깐만...4차원이라고??
이게 무슨 4차원 같은 소리인가?
우리가 이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는 3차원의 현실 속에 살고 있기에, 4차원의 세계를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3차원 이하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조금은 이해가 편하겠다.
예를 들어,
1차원을 살고 있는 "점"에게,
"시공간"에 대해서 설명한다고 해보자.
오늘의 주인공인 "점"은,
아래와 같이 오른쪽으로 움직였다고 해보자.
이 1차원을 살고 있는 "점"에게,
우리가 "시공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1차원의 "공간"을 X축으로, "시간"을 Y축으로 해서 설명해보기로 한다.
그럼 아래의 XY "평면"이 바로,
"점"이 살고 있는 "2차원적" "시공간"이 된다.
1차원 밖에 보지 못하는 "점"은,
아래와 같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멀리 나아간다고만 생각한다.
시공간이라는 2차원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2차원의 시공간을 볼 수 있는 우리에게 있어,
그들이 사는 2차원의 "시공간"의 모습은 아래의 모습과 같다.
1차원의 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한 부분" 밖에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3차원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4차원의 "한 부분" 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1차원의 "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2차원의 "면"이 되고,
2차원의 "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3차원의 "공간"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3차원이라는 "공간"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4차원의 "시공간"을 만드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여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4차원의 시공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이들은 하나의 "시공간"이라는 "4차원"을 형성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시공간의 관계를 간략히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우리가 가만히 "정지"해 있을 때를 생각해보자.
1) 3차원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의 움직임이 없으므로, 다시 말해 "공간"적인 이동이 없으니까, 우리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시간"은 "흐른다"라고 생각한다.
2) 하지만, 4차원적 시공간의 축으로 나타내보면,
정지해 있는 물체도 아래의 그림과 같이 시간 축으로 "이동"하고 있다.
(2) 어떤 물체가 느리게 움직이는(운동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자.
1) 3차원적으로 생각해보면,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고, 이와 독립적으로 "공간"적으로는 일정한 장소로 이동한 것으로 이해한다.
2) 하지만, 4차원적 시공간의 축으로 나타내보면,
아래 그림과 같이 "방향"이 달라졌음을 볼 수 있다.
(3) 그럼 아주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로켓의 경우는 어떨까?
1) 3차원적으로 생각해보면,
짧은 "시간" 안에, "공간"적으로 봤을 때 아주 먼 거리를 이동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2) 하지만, 4차원적 시공간의 축으로 나타내보면,
아래 그림과 같이 x축에 더 가까운 기울기로 "방향"이 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4) 위 (2)번과 (3)번을 4차원의 시공간 위에 함께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초록색 선을 기준으로,
느리게 가는 물체(달팽이)의 시간의 흐름과,
빠르게 가는 물체(로켓)의 시간의 흐름이 다름을 직관적으로 알 수가 있다.
만일 위의 로켓이 빛의 속도와 비슷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게 된다면,
아래의 그림과 같이 기울기는 더 X축(공간) 쪽으로 더욱더 기울어지게 될 것이고,
시간의 흐름은 더욱 느려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로켓이 빛의 속도와 같이 이동하게 된다면,
결국 X축(공간)에 수렴하게 될 것이고,
마침내 시간이 "0", 즉 시간이 멈추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아인슈타인의 아래 설명이 이해가 된다.
"운동하는 물체의 시간의 진행은 느려진다.
그리고 운동의 속도가 빛의 빠르기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지연은 더욱 강해지고,
결국 빛의 빠르기에 도달하면 시간은 멈추게 된다."
이게 사실이냐고?
이걸 입증한 예가 바로 "뮤온"이라는 소립자이다.
뮤온의 수명은 약 2/1,000,000초 이다.
뮤온은 우주에서 날아온 입자들에 의해, 지구 대기 상층부에서 만들어진다.
1) 고전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뮤온이 빛의 속도로 날아가봤자, 수명이 약 2/1,000,000초에 불과하므로 비행거리는 겨우 약 600m에 불과할 것이다. 즉, 뮤온이 대기 상층부에서 만들어지더라도, 대부분 붕괴해 버리고 말 것이므로 지표면까지 도달하는 뮤온의 개수는 거의 없어야 한다.
2) 그런데 실제 실험에서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의 뮤온이 지표면 근처에서 검출된다.
그 이유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비행하는 뮤온의 시간이 늦게 가기 때문이다.
즉, 지표면에 있는 우리는 진작에 지났을 2/1,000,000초가,
광속에 가깝게 이동 중인 뮤온의 입장에서는 이제 경우 2/100,000,000초가 지났을 뿐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 결과 뮤온은 훨씬 먼 거리를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은 물체의 속도에 따라 이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자, 이렇듯 우리는 눈에 보이는 "3차원"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공간이 지배하는 4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소름돋는 사실은,
앞서 설명했듯, 우리가 4차원의 세계에 이미 살고 있다는 것은,
시간이 미래를 향해 "흘러 가는 것"이 아니라,
3차원 공간이 그 다음의 3차원 공간으로 "넘어 가는 과정"일 뿐이고,
우리는 그 넘어가는 과정 중의 "일부"만을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마치 2차원의 세계에 사는 존재가,
앞서 살펴봤던 "점"이 살고 있는 2차원의 시공간을 봤을 때,
아래 그림과 같이,
"이미 존재하는" "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시공간에 펼쳐진 것을 볼 수 있듯...
그렇다.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시공간은
과거 부터 미래까지 이미 모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건, 우주의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미 정해져서 펼쳐져 있되,
단지, 우리가 볼 수 있는 단면의 위치가 계속해서 변할 뿐이며,
단면의 위치가 이동하는 과정을 본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라고 표현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
당신의 미래는 이미 정해져있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미래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우리가 3차원 이하의 세계를 볼 수 있듯이,
4차원 즉 시공간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언자, 점술가, 종교인, 무당과 같은 이들은 마치 "개안"을 하듯 시공간이라는 4차원을 아주 단편적으로라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자들일까?
4차원을 전부 다 볼 수 있는,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시작과 끝을 만들어 낸 존재가 있을까?
그(들)의 존재가 신일까?
아니면 그(들) 또한 누군가에게 의해 창조된 또 다른 "지적인 생명체"일까?
그(들)은 빛의 속도를 기준으로 움직이는 이 광활한 우주가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광대한 크기의 존재일까?
생명체는 왜 만들어진걸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정말 우연의 산물일까?
지구 외에 다른 행성에 생명체는 없는걸까?
미래가 이미 펼쳐져 있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라는 건 허망하지 않나?
우리는 정해진 각본대로, 단지 뇌의 전기신호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걸까?
미래를 바꿀 수 없다면,
노력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라고 생각해서 노력을 하지 않는 것 조차 이미 정해진 미래일까.
...라는 생각 때문에라도 노력을 하도록 만들어서, 결국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 조차 정해진 미래겠지?
과거, 현재, 미래가 펼쳐진 그림과 같다면,
우리가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과거"도, 4차원의 시각에선 모두 "존재"하는 것이고,
나의 흑역사도 모두 고스란히 "존재"하며, 박제되었다고 생각하니 끔찍하군...;;;
더 나아가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선조들도 펼쳐진 시공간에서는 "존재"하는 것이며,
그들이 "존재"하는 것과,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걸까?
우리의 이 "존재"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신이 "우주"라는 비디오 테이프를 만들고,
비디오 플레이어를 통해 상영하고 있는데,
하필 지금 상영하는 순간이 내가 생존하고 활동하고 있는 "현재"인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생이란,
셰익스피어가 멕베드에서 얘기한 것처럼,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말 없이 사라저버리는 가련한 "배우"에 불과한 것일까?
궁금한 것들이 많아진다.
그럼 다음 "양자역학" 포스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실체에 대해서,
과학은 또 어떤 실마리를 주는 지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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