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는가?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법한 주제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도대체 인간은 "왜" 태어난 것일까?
인류는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을 통해
이 답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보려고 했습니다.
같이 한 번 보실까요?
(긴 글 주의!)
1. 철학은 뭐라고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며,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행복은 "의미" 있는 삶" 혹은 "가치" 있는 삶을 통해 구현된다는 사고방식이고,
이를 '도덕책 버전' 의 행복론이라고도 한답니다.
헤겔은,
변증법적인 "정반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기본 상태가 "정(正)"이고,
자기 부정에서 비롯된 모순이 "반(反)",
그리고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여 도달하는 상태가 "합(合)"이라는 것이죠.
인간은 이렇게 "정>반>합>정>반>합"의 과정을 끝없이 거치며,
이 과정은 "절대이성"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헤겔이 보는 인간은 "절대이성"을 추구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뭔가 좀 더 심오하고 어려워졌군요...)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 던져진, "피투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갖고 살아가죠.
하이데거는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곧 "삶의 존재 이유"로 봤습니다.
죽음에 대한 고찰이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며,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 외에도 수 많은 철학자들이 그들만의 답변을 내놓긴 했지만,
딱 "이것"이다 싶은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란 ~이다"라고 정의 내리고고 있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게 "왜?" 그런 것인지,
정말 그게 맞는지...
...에 대한 설득이 가능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는 듯 합니다.
그럼 종교에서는 뭐라고 하는 지 같이 보실까요?
2. 종교에서는 뭐라고 하나?
먼저, 불교는 인간이 "윤회"한다는 전제 하에,
인간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죠.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 창조되었고,
신의 영광을 찬양하고,
신이 베풀어 주는 "구원"을 통해 "영원히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찬양...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고 있는 것이죠.
불교는,
우리 삶에 대해 어떠한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 지에 대해 고찰하며,
인간 삶의 목적을 도출하고 있지만,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는 듯 합니다.
그에 반해 기독교는,
인간의 기원과 목적에 대해, 세상 어느 철학과 종교에 비해 비교적 명확한 답변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는 "성경"을 들이밀고 있죠.
하지만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믿음”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잠깐 "과학적"이라고요?
그럼 어쩌면 과학으로부터 우리는 정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3. 과학은 정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앞서 살펴본 철학과 종교는 인간 삶의 "목적이 있다"고 봤습니다.
즉 “내 삶의 목적은 소명을 달성하는 것”...과 같이,
어떤 사건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일어나는 것"이라는 관점...
이것을 "목적론적 사고(teleological thinking)"라고 합니다.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죠.
반면,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동물에서 진화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이유는 상당 부분 "동물들과 유사"한 것으로 봤습니다.
즉 Key-Word는 바로 "생존과 번식"에 있는 것이죠.
진화론자들이 보기에, 심지어 "행복"조차 단지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도구"라고 봅니다.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의 존재는 단지 "유전자를 운반하기 위한 운반체"일 뿐이라고 했죠.
이렇게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숭고하게 여겨지는 "어버이의 사랑"과 “모성”도 단지 자신의 유전자를 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본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류 과학계에서 우주와 지구, 그리고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아래의 포스팅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빅뱅이론"도 100% 만족할만한 정답은 아닙니다.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고, 빅뱅으로 만들어진 우주의 밖에는 그럼 또 무엇이 있는가?
...등에 대해서는 주류 과학자들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론”인 것이죠.
또 생명의 기원, 즉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타난 과정에 대해서도,
단지 "극도로 낮은 확률의 우연도 반복되다 보면 필연"이라는 수준의 답이고,
수 많은 모델이 있지만, 과연 "무엇이 옳다"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눈치 챘나요?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 또한 “이론”일뿐,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죠.
4.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믿을 것"인지의 문제다.
정답을 알 수 없다면,
결국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 이론 중,
자신이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어떤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지 살펴보고,
각자의 가치관과 취향에 따라 그것을 "믿으면" 될 뿐이죠.
즉,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받아들이는 게,
뭔가 더 객관적,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인 것 같지만,
실상 그들이 주장하는 바도 결국 "이론"에 불과하다면,
그 이론을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흡사 종교나 신앙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한편,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라면,
어쩌면 더 이상 “왜”라는 정답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법륜 스님이 “왜 사는가?”에 대해 그의 생각을 밝힌 적이 있으니, 참고해봅시다.
그는,
“삶은 ‘왜’라는 생각보다 먼저 존재한다.
살고 있으니, 생각도 하는 건데, 왜 사는지 물으면 답이 나올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메뚜기도 살고, 다람쥐도 살고, 나도 살고, 저 사람도 살고, 모두 살고 있는데,
그럼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라고 생각을 바꿔보라”고 충고했죠.
“왜” 사는지 보다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게, 더 "현실적"이고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5. 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이 "창조"된 존재든,
"진화"한 존재든 혹은 다른 뭐가 됐든,
"인간이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죠.
생각해보면,
단지 힘들기"만" 해서 힘든 일은 의외로 드물죠.
내게 주어진 일과 상황이 힘든데,
이걸 감내할 만큼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걸 내가 "원하는 것"인지,
내 "가치관에 부합"된 일인지 모호할 때,
사실 그러한 “무의미하고 무가치함”이야말로 진짜 견디기 어려운 것이죠.
반대로,
힘들어도 "가치 있는 일"이라면, 그건 견딜만합니다.
오늘의 고단함이 현재(또는 미래)의 "행복",
나의 "가치관"과 "믿음"에 충족한다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으로 이어질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단지 "자위"라거나, "희망회로"에 불과한 거 아니냐고요?
뭐가 됐든,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궁극적인 만족감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
그건 긴 삶의 여정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죠.
가치를 되새길 때,
우리는 삶을 단지 견뎌내는 것을 넘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6. 그래서 나의 선택은?
(주의 : 아래는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임)
저는 신의 존재를 믿습니다.
왜냐고요?
이는 초등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확률”에 기반한 것이죠.
관련해서,
지구 역사상 가장 똑똑한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히는,
파스칼(Pascal 1623~1662 프랑스)의 이론을 소개하겠습니다.
신이 있다는 것도 불가해(不可解)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그렇다면 일단 믿고 보는 편이 유리하다.
1) 믿으면, 밑져야 본전이지만,
2) 믿지 않았을 때, 최악의 경우는 무(無)의 나락으로 떨어지죠.
무슨 뜻이냐구요?
대박인 경우를 100%,
본전은 50%,
쪽박은 0%라고 가정해 봅시다.
만일 내가 "신이 있다"고 믿으며 살다가 죽었다고 칩시다.
정말 신이 있으면, 대박(100%)이고,
없다고 해도 본전(50%)일 뿐이죠.
반대로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멋대로 살다가 죽는다면,
만약 신이 없을 때에야 본전(50%)에 불과하지만,
만일 신이 있으면 쪽박(0%)차는 겁니다.
평균치를 계산해보면,
"신이 있다"고 믿을 경우 75%,
"신이 없다"고 믿을 경우는 25%입니다.
결론적으로,
파스칼은 “밑져야 본전”이니, 신이 있다고 믿고 사는 게 더 낫다는 것이죠.
저 또한 그래서 "신이 있다"에 베팅(betting) 했습니다.
사실...굉장히 장황하게 적었지만,
두 줄 요약...
1) 인간으로써는 정답을 "알 수 없다".
2) 모든 건 결국 우리의 "선택(믿음)"에 달려있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아무말 대잔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가상현실)일까? (0) | 2021.08.22 |
---|---|
당신의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feat.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8) | 2021.08.19 |
월급 노예의 월급 중독에 대한 고찰 (2) | 2021.07.16 |
故 다케우치 유코의 명복을 빌며 (죽음과 삶의 의미란?) (0) | 2020.09.28 |
포스트 코로나, 언택트(Untact) 시대의 도래 (0) | 2020.05.31 |
댓글